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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집 및 발언[11.10.12.] 기자회견자료집 : 1012 반도체대전 퍼포먼스

반올림
2022-09-16
조회수 1464

반도체 전자산업 직업병 노동자를 애도하는 글


내 생애 가장 고통스럽고 길었던 순간을 선사한 반도체

- 내 생애 최고(最苦)의 순간(Memory)

 

2011년 10월 12일 일산 킨텍스, 이곳에는 축제의 향연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30여국에서 온 수천 개의 전자산업 업체가 자신의 첨단기술을 뽐내고, 수천 명의 바이어들이 감탄과 찬사를 보내는 자리. 축제의 참가자들은 빛의 속도로 세계 각지의 정보를 연결시키는, 무한한 가능성의 반도체 칩에 환호합니다.

 

그 환호 속에는 얼마 전 별세한 애플의 창업자 스티브잡스의 삶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아이폰과 아이패드로 상징되는 디지털 시대의 새 장을 연 잡스는 오늘 이 축제의 환희이자 추모의 대상입니다.

 

그러나 스티브 잡스의 업적을 찬미하고 그의 죽음을 기리는 동안, 어떤 그리고 많은 죽음들은 잊혀져 갑니다. 바로 반도체 노동자들의 죽음입니다.

 

반도체 노동자들은 스티브잡스에게 부를 안겨준 반도체 칩을 하루 12시간 만들었지만, 이 축제에 초대받지 못했습니다. 반도체 향연을 즐기며 축배를 드는 이들에게 노동자들의 존재는 잊혀진 듯합니다. 반도체를 만들다 병에 걸려 죽어간 노동자들이 있다는 사실은 더욱 기억나지 않는 듯합니다.

 

그러나 노동자들은 죽어갔습니다. 병마와 싸우며 고통에 몸부림쳤습니다. 죽어가는 순간에도 줄어든 통장 잔고와 남겨질 가족들을 걱정해야 했습니다. 그리고 숨을 멎는 순간까지도 병의 원인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자신의 병에 무지했습니다. 그래서 병의 고통을 홀로 짊어졌습니다.

 

그들이 자신의 병에 무지한 이유는 스티브잡스에게 있습니다. 애플사의 부품을 만드는 중국 팍스콘 공장에서 수십명의 노동자들이 잇달아 투신을 해도, 스티브잡스와 반도체산업 경영자들이 '평균 자살율보다 높지 않다'라는 말로 일축했기 때문입니다. 한국의 전자산업 경영자 또한 같은 말을 했겠지요. 그래서 노동자들은 자신이 죽어가는 이유조차 알지 못하고 생을 놓았습니다.

 

우리는 무지한, 그래서 억울한 죽음을 당한 노동자들을 기억합니다. 초대받지 못한 이 축제의 자리에서 그들의 이름을 불러봅니다.

 

19살에 입사하여, 독성 화학물질에 반도체 웨이퍼를 담갔다 빼는 일을 하다가 백혈병에 걸린 삼성반도체 (기흥공장 오퍼레이터) 황유미. 23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했습니다.

황유미와 2인 1조로 같은 작업을 하다가 같은 병에 걸린 이숙영. 갓 출산한 딸을 품에 안지도 못한 채 31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했습니다.

안전장치도 마련되지 않은 초기 설치작업을 하다가 백혈병에 걸린 삼성반도체 (기흥공장 엔지니어) 황민웅. 아내와 갓난 두 아이를 두고 29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했습니다.

자신이 사용한 기계가 방사선 설비인지도 모르고 4년을 일한 삼성반도체 (온양공장 오퍼레이터) 박지연. 백혈병에 걸려 24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했습니다.

암에 걸리고도 병원에 노트북을 가져와 회사일을 할 정도로 열심이었던 삼성전자 (탕정공장 엔지니어) 연제욱. 27살의 나이로 생을 마감했습니다.

길게는 15시간 장시간근무에 시달리다가 입사 1년 만에 우울증에 걸린 삼성전자 (천안공장 엔지니어) 김주현. 사내 기숙사 13층에서 투신해 스스로 26세의 생을 마감했습니다.

15년간 일한 대가로 방사선과 독성물질에 노출되어 백혈병에 걸린 매그너칩 반도체 (엔지니어) 김진기. 두 달 전 38세의 생을 마감했습니다.

까맣게 탄 반도체칩 분진을 마시며 일하다 뇌에 악성종양이 생긴 삼성반도체 (온양공장 오퍼레이터) 이윤정. 현재 투병 중입니다.

이윤정과 같은 공정에서 일하다 중증재생불량성빈혈 진단을 받은 유명화. 10년 째 수혈에 의지하며 투병 중입니다.

발암물질인 납을 온종일 곁에 두고 일하다가 뇌종양이 생긴 삼성전자 기흥공장 한혜경. 1급 장애 판정을 받고 5년째 투병 중입니다.

삼성전자 천안공장에서 과도한 노동강도와 업무 스트레스로 인해 다발성경화증에 걸린 이희진과 김미선. 시력을 크게 잃은 채 투병 중입니다.

 

이들은 취업하고 싶은 기업 1위, 삼성에 들어갔습니다. 첨단산업, 굴뚝 없는 공장이라는 반도체산업에 종사했습니다. 그리고 클린룸에서 보호장구 없이 화학물질에 노출된 채 일했습니다. 화학가스가 새면 측정장비보다 자신의 코를 이용해 가스를 찾고, 설비 안에 들어가 화학물질 찌꺼기를 직접 손으로 닦아냈습니다. 그럼에도 화학물질에 자신을 보호해줄 것이 얇은 방진복이라 믿었던 노동자들. 그들은 밤낮 없이 10시간 12시간 근무를 했고, 잦은 호출에도 군소리 없이 클린룸에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죽어갔습니다. 반도체 전자산업에서 직업병으로 사망한 노동자들의 제보 수는 50여명입니다. 병에 걸렸다고 고통을 호소하는 이들의 수는 150명에 달합니다. 물론 이는 우리가 아는 최소한의 직업병 노동자들일 것입니다.

반도체 축제는 ‘내 생애 최고의 순간’을 말하라 합니다. ‘내 생애 최고의 순간(Memory)’이 스티브 잡스에게, 전자(반도체)산업 경영자들에게, 아이폰과 스마트폰을 손에 쥔 채 첨단기술을 즐기는 우리에게, 언제인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아는 것은, 오늘 이름이 불린 노동자들은 ‘생애 최고의 순간’이 오기도 전에 너무 빠르게 죽어갔다는 사실입니다.


이제 우리는 생애 최고의 순간을 가질 기회조차 박탈당한 노동자들의 죽음과 고통을 말해야 합니다. 이들의 죽음을 추모하지 않고 ‘최고’를 말하는 것을 지켜볼 수 없습니다. 이들의 고통 앞에 머리를 숙이고 축제를 멈춰야 합니다. 그들의 죽음과 고통에 대한 반성 없이 그 어떤 축제도, 찬사도 허락되어선 안 됩니다.

 

이 자리에 모인 이들은

‘내 생애 최고의 순간(Memory)’이라는 거짓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병들고 죽어간 노동자들에게 ‘내 생애 가장 고통스러웠던 순간’을 선사한 것이 바로 반도체 산업임을 인정해야 합니다.

 

2011. 10. 12

반도체 노동자의 건강과 인권지킴이, 반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