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요청서, 보도자료를 받으시려는 기자 님들은 sharps@hanmail.com 으로 명함을 보내주시기 바랍니다.

자료집 및 발언[15.03.04.] [증언대회] 고 손경주 님 아들 손성배 님 발언 전문

반올림
2022-10-13
조회수 1807

2015.3.4 반도체 전자산업 직업병 피해 노동자 증언대회

 

손경주 아들 손성배입니다. 제 아버지 손경주는 삼성반도체 화성사업장 내 협력업체, 기흥사업장 내 협력업체 두 곳에서 관리소장으로 일했습니다. 첫 번째 회사는 메타테크입니다. 2003년 2월 23일, 화성사업장 12, 13라인 PM사 메타테크 관리소장으로 반도체 사업장에 처음 발을 들이셨습니다. 이후 2004년 11월 기가테크 관리소장으로 자리를 옮겨 일하셨습니다. 2003년 2월 23일부터 돌아가신 2012년 8월 31일까지 햇수로 10년 동안 아버지는 삼성반도체 협력사 소속 노동자였습니다.

아버지는 기가테크 재직 중이던 2009년 5월 16일 급성림프구성백혈병 진단을 받았고 한 차례 골수이식 후에 회복해서 복직했다가 2012년 1월 6일 재발 확진을 받고 4월 27일 2차 골수이식-이때는 제대혈-을 받고 투병 중에 패혈증, 폐출혈로 돌아가셨습니다.

지난해 12월엔 반올림의 조정위원회 참여를 논의하기 위해서 피해자와 유가족들이 한 번 모이는 자리가 있었습니다. 20여명 가량이 모였습니다. 가족들이 자기소개를 했습니다.

“저는 어디서 일했고, 지금 무슨 병을 앓고 있는 누구입니다. 저는 어디서 일했고, 지금 무슨 병을 앓다가 사망한 누구 엄마, 아빠입니다.”

자기소개 했을 뿐인데 숙연해졌습니다. 우리는 모여서 자기소개하면 숙연해지는 그런 사람들입니다.

오늘은 누가 누가 잘하나 실력을 겨루는 것도 아닌데 대회라는 이름이 붙은 피해자 증언대회에 나와서 불효막심한 제가 아버지 얘기를 합니다. 전 아버지께서 중환자실 가시는 그 날, 잠깐 병원에 들렀다가 군대 선후임 모임에 갔습니다. 간만에 만나 군대 이야기를 하면서 과음을 했고 강남 뒷골목 모텔에서 외박을 했습니다. 대낮이 다 돼서 일어났습니다. 전화기엔 몇 십 통의 부재중 전화가 와 있었습니다. 어머니가 울면서 빨리 병원으로 오라고 하셨습니다. 휘청 휘청 술이 덜 깬 상태로 지하철 타고 병원에 갔더니 아버지는 이미 인공호흡기 꽂고 잠재우는 약을 맞으신 상태로 보존치료를 하고 계셨습니다. 주치의 선생님은 아버지 폐에 전례 없이 빠른 속도로 균이 퍼졌다고 하셨습니다. 아버지는 그렇게 인공호흡기 꽂고 일주일 동안 있다가 돌아가셨습니다. 주치의 선생님은 아버지가 중환자실로 가신 첫날부터 마음에 준비를 하라고 했습니다. 절망적이었지만 희망을 버리지 않았습니다. 아버지는 그로부터 딱 일주일 후에 돌아가셨습니다. 일주일동안 생명의 끈을 놓지 않고 버티셨습니다. 왜 그러셨나 돌이켜 생각해봤습니다. 태풍 볼라벤 때문이었습니다. 2012년 8월 마지막 주는 한반도 전역이 태풍 볼라벤 영향권에 있었습니다. 8월 30일 저녁 즈음 태풍 영향권에서 벗어나 비가 그치고 맑아졌습니다. 그리고 그 날 새벽 아버지는 돌아가셨습니다. 태풍이 사라지기를 기다리셨던 것입니다. 조문 오는 분들 비바람 부는데 우울하게, 위험하게 오지 말라고 화창한 날을 기다리면서 버티셨던 것이었습니다.

투병 중엔 참 많이 아프셨습니다. 2차 이식 후에 숙주반응 때문에 입술 주변부터 입 안, 장까지 다 헐어서 미음 삼키기도 힘들어하셨으면서 안 먹으면 죽는다고 미음 쌀알을 숟가락으로 짓이겨서 드셨습니다. 진통제에 취해서 정신없는 와중에도 가글 안하면 죽는다고 밤새 가글하시고. 한번은 꿈속에서 소갈빗대를 뜯으셨나봅니다. 주무시다가 두 손을 허공에 하모니카 불듯이 들고 고기 뜯는 시늉을 하셨습니다. 그렇게 힘들게 버티면서 회복되기를 간절히 바라셨습니다. 그러나 결국 갑자기 폐에 바이러스가 퍼지면서 의식을 잃고, 인공호흡기를 삽입한 채로 중환자실로 옮겨 가셨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별다른 유언 없이 돌아가셨습니다.

별다른 유언이 없었던 대신, 정말 많은 기록을 남기고 돌아가셨습니다. 저희 가족은 가족카페를 가지고 있습니다. 아버지는 가족 여행 사진, 친척들 결혼식 같은 행사 사진, 아버지가 하시고 싶은 말씀, 편지 등을 모아놓으셨습니다. 이번에 확인해보니 2008년 5월 13일에 개설하신 카페였습니다. 아버지는 이듬해 5월 16일에 백혈병 확진을 받으셨습니다. 딱 1년 전에 카페를 개설하신 셈입니다. 발병하신 후 아버지는 자신이 왜 아픈지 왜 백혈병에 걸렸는지 고민하면서 자료를 모으셨습니다. 알아내려고도 부단히 노력하셨습니다. 가족 카페에 숨쉬는 아름다운 공간(반도체업무)라는 게시판에 관련 자료를 모으셨습니다. 그리고 기필코 나아서 반올림에도 증언도 하고 일도 하면서 힘을 더하고 싶다고도 하셨습니다. 회사에도 이야기해서 왜 사람들이 아픈지, 왜 내가 아팠는지 밝혀보겠다고 하셨는데 결국 돌아가셨습니다. 오늘 저는 아버지 대신 왔습니다. 그래서 아버지가 살아계셨다면 무슨 이야기를 하셨을까 고민하면서 오늘 드릴 말씀을 준비했습니다.

저희 아버지는 두 협력업체의 관리소장이셨습니다. 먼저, 2003년 2월 23일부터 2004년 10월까지 화성사업장 내 12, 13라인을 관리하는 메타테크에서 근무하셨습니다. 당시 12라인은 삼성이 신규 프로젝트로 진행했던 300mm 웨이퍼 가공 신규라인으로 대내외적으로 관심이 높았던 사업이라고 합니다.

아버지는 반도체 생산라인 환경안전 문제에 대해서도 기록해두셨습니다. 다음은 아버지 일기 손경주 살아온 과거의 일부입니다.

기존 라인에 비해 환경이 좋다곤 했지만 셋업하는 인력들 대부분 화공약품과 노출되는 가스가 있는지 조차 모르고 set-up을 진행했다. 12라인 초기 셋업시 PM품질 향상을 위해 협력사 대표는 물론 관리소장이 8시간 이상 매일 상주하면서 관리했고, 관리소장은 근무 중에 대부분을 관리측면에서 라인 내 현장을 상시 상주하거나 패트롤했다.

2003년부터 2004년 10월까지 연이어 2년간 신규인력 채용면접과 기술인력 교육부터 현장 안전지도 및 SKILL–UP을 위해 노력했다. 이후 2004년 11월 1일자로 메타테크에서 기가테크로 자리를 옮겼다. 연이어 14라인과 S1라인 SET-UP을 했다. 초기 셋업 시에는 FAB 내에 환경이 완전히 구축되지 않은 상태에서 설비가 제조사로부터 도입돼 설치과정에서 환경안전이 거의 무방비 상태였다. 3.4개월의 설비 셋업기간 동안에는 더더욱 열악한 환경을 인정하여야 하며 유해물질에 노출될 수밖에 없다.

유해가스 집진과 배출기능을 하는 국소배기는 설비 SET-UP시 초기에는 설치되어 있지도 않았다. 최근(2011년)에도 기존라인에 국소배기가 고장이 나거나, 국소배기 동작장치인 리모트 콘트롤이 고장이 나서 사용 불가한 경우가 비일비재해 센터장이 수시로 직접 개선 지시를 하고 있다.

아버지는 삼성의 협력사 운영 개입에 대해서도 기록을 남겨 두셨습니다.

실적관리를 위하여 매일 매일 TPM 활동과 독려 및 감독을 하여야 하며, 환경안전 사고 예방을 위하여 노력과 인사・노무관리까지 책임을 지고 무노조 경영에 동참을 하여함은 물론, 인사지원팀과 제조혁신팀의 관리감독을 받아야 했다. 또한 연말 성과급을 위해 관리 지표인 패널티를 적게 받아야 했고 보안사고와 현장 품질사고 등을 측정해 보고했다.

라인별 별도로 협력사를 두어 삼성에서 업무분장을 하고 라인을 구분・관리하는데 삼성의 재직자 출신(대부분 부장출신)을 관리사장으로, 그 밑에 관리소장을 두고 PM 기술인력을 100여명씩 인사, 노무, 기타 관리를 아웃소싱으로 관리한다. 라인 내에서는 SUB CLEAN ROOM이라 하여 설비에서 나온 부품을 자체세정하기 위한 유기세정기와 SOURCE HEAD를 분리하고 조립한다. 또한 CMP 공정의 PAD와 HEAD를 세정한다. PHOTO의 경우 버블세정기와 BEAD를 통해 아세톤을 활용, BOWL세정을 하고 DRY OVEN기기 등을 SUB CLEAN ROOM에 설치하고 관리한다. 설비유지보수는 삼성의 현업직원과 대부분 같이 수행하다가 노동부에서 문제를 제가하자 업무영역을 엄격히 구분하려고 노력은 하였으나, 실질적으로 잘 이뤄지지 않았다.

협력사 직원은 오직 협력사 대표이사의 법인사업체를 통하여 협력사 직원에게 급여를 전달하는 역할만 한다, 관리소장은 인사,노무,현장관리와 현장 안전관리 규정 등을 삼성의 룰에 의해 전적으로 통제받는다. 현대차 본사직원과 협력사 직원간 오른쪽 바퀴 셋업은 현업이, 왼쪽은 협력사 직원이 하듯, 반도체 제조공정도 마찬가지라고 봐도 무방하다. …협력사 직원들의 인건비는 현업의 기료비에서 소모품비용으로 처리하는 등, 대기업의 부당한 행위는 여러 가지가 있다.

부당한 행위 여러 가지가 무엇인지 진작 물어봤어야 했습니다. 전 아버지가 당연히 쾌차하실 줄 알았습니다. 여쭤보면 스트레스 받으시고 투병에 방해가 될까봐 안 여쭤봤습니다. 돌아가시기 전에 아버지가 써놓으신 글들을 읽어보고 여쭤봤어야 했다는 아쉬움과 후회가 너무나 큽니다.

2003년 초창기에는 채용까지도 간섭을 했다. 채용대상인원 신원조회등도 삼성에서 해줬다. 최근에는 개인정보보호법에 의하여 없어진 내용이지만 채용시에 무노조를 우선으로 지역과 성향등을 보고 채용하도록 수시 인사팀과 동반성장팀에서 푸쉬를 하기도 한다.

아버지께서는 황유미 누나의 일도 알고 계셨습니다. 일기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있습니다.

2007년부터 인사지원팀에서 고 황유미씨 건으로 협력사 소장간담회를 정기적으로 추진하면서 대책마련을 하고 숨기기에 급급했다. 유해물질이 없다고 매스컴에서 발표하는 삼성반도체 권오현 부회장을 보고 울분을 삭히기도 했다.

아버지는 제게 마음 한 켠을 꾹 누르는 짐 덩어리입니다. 엄청나게 많은 숙제를 남겨놓고 혼자 납골함에 들어가셨습니다. 아버지는 돌아가시기 전에 어머니와 제게 이종란 노무사님, 공유정옥 선생님 번호를 알려주셨습니다. 그리고 만약 아버지 자신이 잘못되면 반올림에 연락을 해보라고 하셨습니다. 카페엔 산재신청 절차에 대해서도 옮겨놓으셨습니다. 왜 잘못되면 연락해보라고 하셨을까요? 왜 살아계실 때 산재신청을 하자고 하지 않으셨을까요? 그건 제가 판단할 수 없는 문제지만 아무래도 의리였던 것 같습니다. 회사와 등을 져야 하기 때문에 살아계시는 동안엔 문제를 제기하고 싶지 않으셨던 것 같습니다. 아버지가 아프셔서 회사에 풀타임으로 근무하지 못하셨지만 기가테크 사장님은 임금을 챙겨주셨습니다. 어머니, 저, 제 동생을 책임져야 한다는 가장의 역할 때문에 산재신청하자고, 반올림에 연락하라고 말씀하지 않으셨던 것입니다.

아버지는 결국 잘못되셨고, 덮어두고 가기엔 너무나도 상세하게 기록해두셨습니다. 아버지 돌아가신 후 5일 후 아버지 써놓으신 일기, 글들을 열심히 들여다봤습니다. 그런데 그때는 정신이 나가있어서 그랬는지 잘 와 닿지가 않았습니다. 마냥 슬펐습니다. 아버지가 이젠 곁에 없다는 사실이 저를 무척이나 힘들게 했습니다. 아버지는 어머니와 남동생에게 힘들다는 말씀을 안 하셨다는 것을 최근에야 알았습니다. 제겐 힘들다는 말씀을 많이 하셨습니다. 38세 젊은 아저씨 손경주는 제가 8살 때 처음으로 힘들다는 말을 했습니다. IMF 직전 사업이 잘 안됐을 때 였던 것 같습니다. 수차례 힘들다고 하시면 ‘아빠가, 다 큰 어른이 뭘 힘들어’하는 생각을 속으로 하면서도 아무 말씀 안 드리고 안아드렸던 기억이 있습니다.

2009년 처음 발병하신 후에 이식을 받으신 후 집에서 쉬실 때의 일입니다. 아버지가 어머니와 말다툼을 하시고 나서 가출을 하셨습니다. 급하게 쫓아나갔는데 이미 멀리 가신 것 같았습니다. 집 주변을 배회하면서 아버지를 찾다가 제가 졸업한 초등학교에 들어갔더니 운동장 귀퉁이 바위 위에 아버지가 쭈그려 앉아 계셨습니다. 옆에 가서 앉았습니다. 아버지가 작아지신 게 너무 가슴 아프고 억울했습니다. 그래서 펑펑 울었습니다. 아버지도 우셨습니다. 다 큰 남자 둘이 껴안고 울었습니다. 한참을 울고 난 후, 아버지가 하시는 말씀,

“엄마랑 영배 앞에선 울지 마라”

그 약속을 아버지 돌아가시기 전까진 지켰습니다. 그러나 돌아가신 날 새벽, 약속을 지키지 못하고 말았습니다. 장례식장에서 아버지가 손으로 쓰신 투병일기를 손에 들고 엉엉 울었습니다. 아버지랑 저는 서로 힘들다고 솔직하게 이야기하는 사이였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런 아버지가 없다는 사실이 너무나도 슬펐습니다. 그래서 울었습니다. 이제야 슬픈 감정 없이 그리운 감정만 가지고 아버지 사진을 쳐다봅니다. 그리고 아버지 쓰신 글을 차분히 읽습니다. 아버지 가신지 거의 3년이 다 돼서야 슬프지가 않습니다.

다시 읽어보니 아버지는 정말 담담히 자기가 보고 겪은 일을 기록해두셨습니다. 그런데 지금 삼성과 근로복지공단은 아버지의 기록과 주장을 정반대로 뒤집어놓고 아버지를 거짓말쟁이로 만들고 있습니다. 삼성은 ‘회사에 기여한 것에 대한 보답 차원의 위로금이기 때문에 보상대상에 협력업체 직원들을 포함시킬 수 없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덧붙여 ‘협력사 직원은 이직 등이 잦아 인사나 근태 등에 대한 기록이 남아있지 않은 문제가 있다’고 입장을 내놓고 있습니다. 우리 아버지가 정말 회사에 기여한 것이 없을까요? 12, 13, 14, S-1 4개 신규라인을 증설하는 데 관여했고, 그 라인에서 일하는 인력을 전국 공과대학을 돌아다니며 뽑아서 훈련시켰습니다. 삼성은 아버지에게 관리감독 업무를 맡기고 작업량을 보고하게 했으며 그 작업량만큼 인건비를 줬습니다. 보안사고와 현장품질 관리 결과를 보고하게 했고 그 지표에 따라 성과급을 줬습니다. 그래놓고 이제 와서 삼성은 책임을 회피하고 있습니다.

근로복지공단도 아버지의 기록을 거짓으로 치부했습니다. 유족급여 부지급 통보 공문에 따르면 “고인의 업무는 현장 소장 업무로써 유해화학물질의 노출빈도 및 노출수준이 낮고, 신청상병을 유발할 만큼 물리화학적 유해인자에 직접적으로 충분히 노출됐던 근거가 명확하지 않아 업무와 관련해 발병 및 사망에 이르렀다고 판단하기는 어렵다”고 적어놨습니다. 이상규 노무사님이 공들여 작성하신 제출자료를 읽어보긴 한 것일까요? 작년 10월 말엔 질병판정위원회에서 죄인이 된 것처럼 면담을 했습니다. 이상규 노무사님, 어머니, 저 이렇게 셋이 회의실에 들어갔습니다. 앉자마자 위원장이 발언은 1명만 할 수 있고, 면담은 10분 내로 진행된다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면담에 대한 간략한 개요 설명이 끝난 후 판정위원 중 한명이 하는 말이 제 속을 뒤집어놨습니다.

“동료들은 모두 작업장에 들어가지 않았다고 하는데요. 정확히 무슨 일을 한 겁니까?”

노무사님은 일기에 써있는 대로 답변하셨습니다. 그리고 이미 제출한 자료에 피해자의 증언이 적혀있다고도 덧붙였습니다. 그 판정위원은 아버지 일기와 동료들의 증언이 배치된다며 계속 의문을 제기했습니다. 결과는 불승인이었습니다. 아버지 일기는 묵살당했습니다. 전에 삼겹살에 소주 한잔 하자던 회사 아저씨도, 같이 축구했던 회사 형들 모두 그런 증언을 한 것일까요? 그렇게 우리 아버지를 거짓말쟁이 만들면 되는 건가요? 아버지가 이런 문구를 남겨 놓으셨습니다.

“나는 글로 남긴다. 거짓이 아니기 때문에. 말로 거짓을 말하고는 나중에 그런 적 없다고 하면 그만인가?”

전 이제 멈출 수가 없습니다. 전 아들이기 때문에 아버지가 써놓으신 것들을 당연히 옳다고 주장해야 합니다. 아버지 말씀이 옳다고 떠들어대야 합니다. 이미 이겼습니다. 번복할 수 없는 기록들을 아버지 스스로 남겨두셨습니다. 그 기록 안에서 아버지가 하시고자 했던 말씀을 찾아서 계속 전해야 할 의무가 이젠 제게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