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11. 23 농성 47일차 55일차 이어말하기
초대손님 : 현실문화<곁에 서다> 북콘서트
초대손님 김중미, 공유정옥
3번 카메라 인증 : 강화도에서 살사는 김중미이다.
이 책에 참여하게 된 계기 : (김중미)편집자가 어느날 인권교육에 와서 동화에 와서 얘기 해달라더라. 책으로 낼 꺼라는 편집자에 대한 믿음과 신뢰로 참여하게되었다.
(공유정옥) 박래군 선생님이 인권 강의롤 해달라고 해서 부탁받고 했다.
김중미 선생님은 <굉이부리말 아이들> 동화책으로 세상에 많이 알려졌다. 200만부가 팔렸다는데 베스트셀러로 불리는 게 부담스러워 하신다고 들었다.
사진을 일부러 옆모습을 찍은 건가? 걸음마를 시작한 뒤 찍은 사진의 포즈는 다 똑같다. 사진이 너무 없어 찍어달라고 후배에게 부탁했다. 공부방 인형극 찍을 때 찍었는데 사진이 따뜻했다.
공유정옥 선생님은 모델 포즈다.
벽에 셀카로 찍은 포즈다.
김중미 선생님은 어릴적부터 누군가의 아픔에 외면해선 안 된다는 마음으로 사신 분이다. 베스트 셀러 작가이면 좋은 곳에서 작품에 전념하지 않을까싶은데 기파길옆 작은 학교에서 아이들과 같이 생활하며 계속 곁에 있는 마음이 궁금하다.
<굉이부리말 아이들> 잘 나가지 않는 책이다. 뜨게된 계기는 느낌표 프로그램이다. 다른 작품보다 부끄럽고 찜찜하다. 몸들 바를 모르겠다. 방송 한 번 나간 뒤 통장보고 로또라고 생각했다. 돈이 제 께되면 말이 안 된다. 글에 바친 시간만큼이 내 몫이라 생각했다. 저희 가족만을 위해 살고 있었다면 뻔뻔했을 것이다. 여럿이 통장을 보며 어떻게 하지? 걱정했다. 방송에서 굉이부리말 아이들 함께 쓰겠다.고 나오던데, 나는 이 돈이 삶을 바꾸거나 시혜적인 차원으로 나눠지는 게 싫었다. 우리 아이들은 중 고등학교 아이들만 방송에 나오는 줄 알았다. 고등학교 아이들만 촬영했다.
요즘에는 <굉이부리말 아이들 2>를 생각하고 있다. 올 여름에 저희 동네에 옛 생활체험관이 생겼는데, 처음에는 빈민 체험관 이라는 이름이었다. 김중미 생가를 만들다고 하여 안 하기로 하기도 했다. 어느날 활동가가 옛날 괴종시계를 찾아서 알게되었다. 동네잔치를 관에서 만들어 할머니 할아버지에게 앞치마 입힌다느니... 관에서 하는 일이 이상하다. 가난이 어떻게 상품화되는가를 굉이부리말 아이들2에서 써야겠다고 생각한다.
현재 진행형인 삶을 구경거리로 만들어 돈을 만들고 지역사회의 랜드마크로 만들려는 기막힌 상황이다. 이 동네는 강남역에 40억짜리 강남스타일 청동상 만들겠다는 발상을 하기도 한다. 어이 없다.
굉이부리말 아이들 이 책은 내가 쓴 책이지만 부가 나한테만 와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삼성의 부가 누가 일구어냈는지 생각 없이 경영자, 오너의 탁월한 탁월한 능력에 의해서 이루어졌다는 뻔뻔함을 다시 돌아봐야 한다.
공유정옥 선생님도 잘나가는 길 마다하고 대학 이후 철거촌 방문 후 다른 길을 간 것으로 안다.
공유정옥 : 삶이 바뀐 계기는 가랑비에 옷젖듯 했다. 부댖기는 것들이 많았다. 편안하게 살고는 싶지만. 누군가를 밟고 행복하고 싶지는 않았다. 나는 은수저는 물고는 태어난 것 같은데.. 은수저를 물려준 우리 부모가 안 그런 부모보다 더 나은 것은 아니다. 내가 경험한 것 이외에는 눈에 안 보이는 것 같다. 나를 확 열고 일인칭이 되는 건 상상하기 힘든데.. 쭈빗쭈빗... 하며 천천히 일인칭이 되어가는 중이다.
김중미 선생님이 강남역에 두 번째 오셨다더라. 난 진자 강남에서 학교를 다녔다. 그런데 그 때와 지금이 달랐다. 학원 한 번 가봤으면.. 했고 왜 우리 엄마는 집에 있지? 생각했고, 학교 끝나면 뭐 하고 놀까를 고민했다. 노는 게임 룰이 다르긴 해도 뭐 있냐고 비교하거나 차별하진 않았다. 사는 곳이 달라고 다 섞여 살았다. 지금은 강남이 주는 차이가 크다. 기득권이 일찍부터 그어지는 것 같아 안타깝고 화가 난다.
지난 10년 간 양극화가 강해졌다. 강정 때문에 이번 반올림으로 강남역에 두 번째 방문한 김중미 선생님 기분이 어떻냐?
인천에도 지하도가 있다. 8번 출구 표지만 안 보았으면 길을 잃었을 것이다. 도시에 익숙한 이가 아니면 길을 잃었을 것이다.
공유정옥 선생님과 겹치는 부분이 있는 것 같다. 나도 상계동에서 도시 빈민 운동을 했다. 그 때 5학년 아이가 담벼락에 깔려죽은 일을 경험했다.
고등학교 입학할 때 대학 안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4남매 중 첫째로 ‘니가 사내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라는 부모의 말이 싫어서 나 대학 안 갈거라고 선언했다. 3년만 직장생활하고 나머지는 나 하고 싶은 일 하고 살 거라도 다짐했다. 고등학교 때는 음악, 미술, 고양이랑 놀며 자유롭게 살았다. 졸업 후 00병원 행정직 노동직으로 들어갔다. 처음에는 기획실에 들어가서 칼출근 칼퇴근이었다. 그 안에서도 알력이 있고었다. 사무직한테도 편을 선택하라고 하더라. 안 낀다고 하니 말을 잘 안 듣는 아이라고 하여 원무가로 가게 되었다. 15시간씩 일했다. 밤이 되면 구리 신림 구로 등에서 산재 입거나 동맥을 끊어서 오는 걸 봤다. 낮에는 모피 코트 입고 십만원 짜리 수표 내미는 이가 있는가하면 밤에는 그렇더라. 간호사도 다 계급으로 쪼개어져 있고 누군가는 돈이 없어서 죽어가거나 짤린 손을 붙이지 못하기도 하는 걸 경험했다. 3년을 일하면 난 행복할까?? 질문더니 아니더라. 이렇게 아닌 척하며 살 수 있을까? 란 질문에 아니다. 싶어 그 안에 살기로 했다.
현실에서 보게된 것을 외면하지 않았고, 이 곳에서 곁에 서서 든든한 친구가 되고 있는 것 같다. 이 곳에 있으면서 외면하지 않는 이들의 소중함을 깨닫고 있다. 얼마나 많은 이들이 아프냐. 갓 졸업한 이가 일하다 죽었는데 본체만체하는 이들이 있는가 하면 이렇게 같이 있는 이들이 있다.
동화를 계속 쓰시게 되는 이유는 무엇인가?
≪모두 까몬> 이라는 얘기를 쓰기도 했다. 개인적으로 농촌 공동체가 필요해서 강화도에 들어갔다. 13년 정도 살게 되었다. 농촌이 낭만적인 건 아니라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생으로 보고 경험하게 되었다. 농촌에 조손가족이 많다. 우리 학교에 공부방이 필요한 아이들이 많더라. 그 곳에서도 방을 내어줄 필요가 있었다. 세상과 소통하고 하고 싶은 얘기를 하려고 글을 쓰기 시작했는데 실패된 자로 규정된 농촌아이들의 또 실패한 아이들 얘기를 해야겠다싶더라. 농촌 이야기. 구제역, 결혼이주여성 이야기를 fta를 배경으로 깔고 쓰고자 했다. 모두 까몬은 고맙다는 얘기이다. 같이 살아가는 얘기가 모두 까몬의 얘기이다.
내년에 산문집을 낸다. 나는 왜 글을 쓸까 생각해보니 가난을 세상에 얘기하고 싶어서였더라. 오늘도 우리 동네 80 노인이 자살을 한 사건을 목격하고 왔다. 가난을 선택하고 회의가 오기도 하더라. 세상에 가난은 개인의 책임이 아니라는 것을 말하고 싶었다. 별 볼일 없는 아이들, 가난한 아이들 얘기를 하려고 시간 쪼개서 글을 썼다. 그게 굉이부리말 아이들이다. 글을 쓰는 건 제게 주어진 일이라고 생각하고 계속했다.
괜찮아 너의 책임이 아니다. 라는 말에 울컥하게 된다. 직업병 피해자, 어른의 아픔이 내가 왜 유미를 반도체 공장에 보냈나. 라는 자책을 많이 한다.
공유정옥 : 5년 전에 세상을 떠난 지연 씨는 87년에 태어났다. 생전 영상이 있다. 항암치료 하는 도중에 인터뷰를 했는데 “나만 이렇게 되어서 억울하다”는 얘기를 했다. “빨리 나아서 얼른 돈 벌고 싶다. 엄마 아빠한테 미안하다” 고 그랬다. 지연씨만 그러는 게 아니다. 자신의 얼굴을 내 놓고 싶지 않지만, 내가 병 걸린 게 무슨 자랑도 아니고.. 병 나아서 다른 곳에서 일할 수도 있는데... 그런데, 지연씨가 자신을 사진을 찍어달라고 한적이 있더라. 삼성에서 와서 다 도와주겠다고 얘기해주겠다 해놓고 안 오니.. 발 동동구르다.. 나를 취재해 달라. 한거다. 영상을 찍으며 모금을 해달라. 라고 하더라. 너무 화가 났다. 왜 얼굴을 팔아야 할까? 자신의 아픔을 팔아야 할까? 모멸감을 감내하지 않고는 생존을 생각할 수 없는 사회이다. 그런데 아직 삼성은 똑같이 군다. 빈곤을 대할 때 이 사회는 너가 얼마나 힘든지 증명하라고 한다. 잔인하다. 삼성이 독단적인 보상위원회를 만들어 자격 심사를 한다.
김중미 : 삼성도 그렇고 박근혜 정부도 그렇고 허점 많은 민주주의지만 대리인으로 선 자들이 착각한다. 봉건왕조도 아니고, 무슨 무소불위의 권력을 가졌다고 착각한다. 학교에서 노동교육을 가르치치 않고. 노동자가 아니라 노예로 인식한다. 교육을 가서 여러분의 미래가 노동자라고 생각하는 사람, 손 들어보라! 하면 처음에 안 든다. 노동자에 대해 얘기해주면 반이 든다. 사실 90 프로 노동자가 되고 그 중 대다수가 비정규직이라고 설명한다. 강남에 있는 학교에 간 적이 있는데 벽을 마주하고 있는 느낌이더라.
그 외 다른 학교 에서 노동자 얘기를 해주면 어떤 애들은 반발하고, 어떤 이는 우울하고 어떤 이는 고맙다고 한다. 특성화고에 삼성이 지원서 보낸다. 선생님들은 지원서를 자랑스럽게 내민다. 그런데 나는 권할 수가 없다. 비참한 현실을 알려준다고 싫어할지는 모르지만, 비참한 현실을 응시해야 바꿀 수 있다. 내가 주인이다. 비정규직, 최저임금을 얘기해서 알아야 더 비참하지 않을 것이다.
2015.11. 23 농성 47일차 55일차 이어말하기
초대손님 : 현실문화<곁에 서다> 북콘서트
초대손님 김중미, 공유정옥
3번 카메라 인증 : 강화도에서 살사는 김중미이다.
이 책에 참여하게 된 계기 : (김중미)편집자가 어느날 인권교육에 와서 동화에 와서 얘기 해달라더라. 책으로 낼 꺼라는 편집자에 대한 믿음과 신뢰로 참여하게되었다.
(공유정옥) 박래군 선생님이 인권 강의롤 해달라고 해서 부탁받고 했다.
김중미 선생님은 <굉이부리말 아이들> 동화책으로 세상에 많이 알려졌다. 200만부가 팔렸다는데 베스트셀러로 불리는 게 부담스러워 하신다고 들었다.
사진을 일부러 옆모습을 찍은 건가? 걸음마를 시작한 뒤 찍은 사진의 포즈는 다 똑같다. 사진이 너무 없어 찍어달라고 후배에게 부탁했다. 공부방 인형극 찍을 때 찍었는데 사진이 따뜻했다.
공유정옥 선생님은 모델 포즈다.
벽에 셀카로 찍은 포즈다.
김중미 선생님은 어릴적부터 누군가의 아픔에 외면해선 안 된다는 마음으로 사신 분이다. 베스트 셀러 작가이면 좋은 곳에서 작품에 전념하지 않을까싶은데 기파길옆 작은 학교에서 아이들과 같이 생활하며 계속 곁에 있는 마음이 궁금하다.
<굉이부리말 아이들> 잘 나가지 않는 책이다. 뜨게된 계기는 느낌표 프로그램이다. 다른 작품보다 부끄럽고 찜찜하다. 몸들 바를 모르겠다. 방송 한 번 나간 뒤 통장보고 로또라고 생각했다. 돈이 제 께되면 말이 안 된다. 글에 바친 시간만큼이 내 몫이라 생각했다. 저희 가족만을 위해 살고 있었다면 뻔뻔했을 것이다. 여럿이 통장을 보며 어떻게 하지? 걱정했다. 방송에서 굉이부리말 아이들 함께 쓰겠다.고 나오던데, 나는 이 돈이 삶을 바꾸거나 시혜적인 차원으로 나눠지는 게 싫었다. 우리 아이들은 중 고등학교 아이들만 방송에 나오는 줄 알았다. 고등학교 아이들만 촬영했다.
요즘에는 <굉이부리말 아이들 2>를 생각하고 있다. 올 여름에 저희 동네에 옛 생활체험관이 생겼는데, 처음에는 빈민 체험관 이라는 이름이었다. 김중미 생가를 만들다고 하여 안 하기로 하기도 했다. 어느날 활동가가 옛날 괴종시계를 찾아서 알게되었다. 동네잔치를 관에서 만들어 할머니 할아버지에게 앞치마 입힌다느니... 관에서 하는 일이 이상하다. 가난이 어떻게 상품화되는가를 굉이부리말 아이들2에서 써야겠다고 생각한다.
현재 진행형인 삶을 구경거리로 만들어 돈을 만들고 지역사회의 랜드마크로 만들려는 기막힌 상황이다. 이 동네는 강남역에 40억짜리 강남스타일 청동상 만들겠다는 발상을 하기도 한다. 어이 없다.
굉이부리말 아이들 이 책은 내가 쓴 책이지만 부가 나한테만 와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삼성의 부가 누가 일구어냈는지 생각 없이 경영자, 오너의 탁월한 탁월한 능력에 의해서 이루어졌다는 뻔뻔함을 다시 돌아봐야 한다.
공유정옥 선생님도 잘나가는 길 마다하고 대학 이후 철거촌 방문 후 다른 길을 간 것으로 안다.
공유정옥 : 삶이 바뀐 계기는 가랑비에 옷젖듯 했다. 부댖기는 것들이 많았다. 편안하게 살고는 싶지만. 누군가를 밟고 행복하고 싶지는 않았다. 나는 은수저는 물고는 태어난 것 같은데.. 은수저를 물려준 우리 부모가 안 그런 부모보다 더 나은 것은 아니다. 내가 경험한 것 이외에는 눈에 안 보이는 것 같다. 나를 확 열고 일인칭이 되는 건 상상하기 힘든데.. 쭈빗쭈빗... 하며 천천히 일인칭이 되어가는 중이다.
김중미 선생님이 강남역에 두 번째 오셨다더라. 난 진자 강남에서 학교를 다녔다. 그런데 그 때와 지금이 달랐다. 학원 한 번 가봤으면.. 했고 왜 우리 엄마는 집에 있지? 생각했고, 학교 끝나면 뭐 하고 놀까를 고민했다. 노는 게임 룰이 다르긴 해도 뭐 있냐고 비교하거나 차별하진 않았다. 사는 곳이 달라고 다 섞여 살았다. 지금은 강남이 주는 차이가 크다. 기득권이 일찍부터 그어지는 것 같아 안타깝고 화가 난다.
지난 10년 간 양극화가 강해졌다. 강정 때문에 이번 반올림으로 강남역에 두 번째 방문한 김중미 선생님 기분이 어떻냐?
인천에도 지하도가 있다. 8번 출구 표지만 안 보았으면 길을 잃었을 것이다. 도시에 익숙한 이가 아니면 길을 잃었을 것이다.
공유정옥 선생님과 겹치는 부분이 있는 것 같다. 나도 상계동에서 도시 빈민 운동을 했다. 그 때 5학년 아이가 담벼락에 깔려죽은 일을 경험했다.
고등학교 입학할 때 대학 안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4남매 중 첫째로 ‘니가 사내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라는 부모의 말이 싫어서 나 대학 안 갈거라고 선언했다. 3년만 직장생활하고 나머지는 나 하고 싶은 일 하고 살 거라도 다짐했다. 고등학교 때는 음악, 미술, 고양이랑 놀며 자유롭게 살았다. 졸업 후 00병원 행정직 노동직으로 들어갔다. 처음에는 기획실에 들어가서 칼출근 칼퇴근이었다. 그 안에서도 알력이 있고었다. 사무직한테도 편을 선택하라고 하더라. 안 낀다고 하니 말을 잘 안 듣는 아이라고 하여 원무가로 가게 되었다. 15시간씩 일했다. 밤이 되면 구리 신림 구로 등에서 산재 입거나 동맥을 끊어서 오는 걸 봤다. 낮에는 모피 코트 입고 십만원 짜리 수표 내미는 이가 있는가하면 밤에는 그렇더라. 간호사도 다 계급으로 쪼개어져 있고 누군가는 돈이 없어서 죽어가거나 짤린 손을 붙이지 못하기도 하는 걸 경험했다. 3년을 일하면 난 행복할까?? 질문더니 아니더라. 이렇게 아닌 척하며 살 수 있을까? 란 질문에 아니다. 싶어 그 안에 살기로 했다.
현실에서 보게된 것을 외면하지 않았고, 이 곳에서 곁에 서서 든든한 친구가 되고 있는 것 같다. 이 곳에 있으면서 외면하지 않는 이들의 소중함을 깨닫고 있다. 얼마나 많은 이들이 아프냐. 갓 졸업한 이가 일하다 죽었는데 본체만체하는 이들이 있는가 하면 이렇게 같이 있는 이들이 있다.
동화를 계속 쓰시게 되는 이유는 무엇인가?
≪모두 까몬> 이라는 얘기를 쓰기도 했다. 개인적으로 농촌 공동체가 필요해서 강화도에 들어갔다. 13년 정도 살게 되었다. 농촌이 낭만적인 건 아니라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생으로 보고 경험하게 되었다. 농촌에 조손가족이 많다. 우리 학교에 공부방이 필요한 아이들이 많더라. 그 곳에서도 방을 내어줄 필요가 있었다. 세상과 소통하고 하고 싶은 얘기를 하려고 글을 쓰기 시작했는데 실패된 자로 규정된 농촌아이들의 또 실패한 아이들 얘기를 해야겠다싶더라. 농촌 이야기. 구제역, 결혼이주여성 이야기를 fta를 배경으로 깔고 쓰고자 했다. 모두 까몬은 고맙다는 얘기이다. 같이 살아가는 얘기가 모두 까몬의 얘기이다.
내년에 산문집을 낸다. 나는 왜 글을 쓸까 생각해보니 가난을 세상에 얘기하고 싶어서였더라. 오늘도 우리 동네 80 노인이 자살을 한 사건을 목격하고 왔다. 가난을 선택하고 회의가 오기도 하더라. 세상에 가난은 개인의 책임이 아니라는 것을 말하고 싶었다. 별 볼일 없는 아이들, 가난한 아이들 얘기를 하려고 시간 쪼개서 글을 썼다. 그게 굉이부리말 아이들이다. 글을 쓰는 건 제게 주어진 일이라고 생각하고 계속했다.
괜찮아 너의 책임이 아니다. 라는 말에 울컥하게 된다. 직업병 피해자, 어른의 아픔이 내가 왜 유미를 반도체 공장에 보냈나. 라는 자책을 많이 한다.
공유정옥 : 5년 전에 세상을 떠난 지연 씨는 87년에 태어났다. 생전 영상이 있다. 항암치료 하는 도중에 인터뷰를 했는데 “나만 이렇게 되어서 억울하다”는 얘기를 했다. “빨리 나아서 얼른 돈 벌고 싶다. 엄마 아빠한테 미안하다” 고 그랬다. 지연씨만 그러는 게 아니다. 자신의 얼굴을 내 놓고 싶지 않지만, 내가 병 걸린 게 무슨 자랑도 아니고.. 병 나아서 다른 곳에서 일할 수도 있는데... 그런데, 지연씨가 자신을 사진을 찍어달라고 한적이 있더라. 삼성에서 와서 다 도와주겠다고 얘기해주겠다 해놓고 안 오니.. 발 동동구르다.. 나를 취재해 달라. 한거다. 영상을 찍으며 모금을 해달라. 라고 하더라. 너무 화가 났다. 왜 얼굴을 팔아야 할까? 자신의 아픔을 팔아야 할까? 모멸감을 감내하지 않고는 생존을 생각할 수 없는 사회이다. 그런데 아직 삼성은 똑같이 군다. 빈곤을 대할 때 이 사회는 너가 얼마나 힘든지 증명하라고 한다. 잔인하다. 삼성이 독단적인 보상위원회를 만들어 자격 심사를 한다.
김중미 : 삼성도 그렇고 박근혜 정부도 그렇고 허점 많은 민주주의지만 대리인으로 선 자들이 착각한다. 봉건왕조도 아니고, 무슨 무소불위의 권력을 가졌다고 착각한다. 학교에서 노동교육을 가르치치 않고. 노동자가 아니라 노예로 인식한다. 교육을 가서 여러분의 미래가 노동자라고 생각하는 사람, 손 들어보라! 하면 처음에 안 든다. 노동자에 대해 얘기해주면 반이 든다. 사실 90 프로 노동자가 되고 그 중 대다수가 비정규직이라고 설명한다. 강남에 있는 학교에 간 적이 있는데 벽을 마주하고 있는 느낌이더라.
그 외 다른 학교 에서 노동자 얘기를 해주면 어떤 애들은 반발하고, 어떤 이는 우울하고 어떤 이는 고맙다고 한다. 특성화고에 삼성이 지원서 보낸다. 선생님들은 지원서를 자랑스럽게 내민다. 그런데 나는 권할 수가 없다. 비참한 현실을 알려준다고 싫어할지는 모르지만, 비참한 현실을 응시해야 바꿀 수 있다. 내가 주인이다. 비정규직, 최저임금을 얘기해서 알아야 더 비참하지 않을 것이다.